[SS인터뷰] 한석규 “이제는 연기를 조금 알 것 같아요”
[SS인터뷰] 한석규 “이제는 연기를 조금 알 것 같아요”
  • 승인 2017.03.22 08: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워낙 예전부터 한석규의 연기를 보고 자란 세대여서일까, 인터뷰 중 문득 한석규의 나이를 몰래 가늠해 보자니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한석규는 64년생, 올해로 54세의 중년 배우다.

어림잡아 생각했던 것보다 젊은 나이었다. 그만큼 한석규의 연기에서 오는 중후함과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묻어나오는 신중함은 한석규의 연륜을 더욱 오래된 것이라 오해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 같은 여유로움과 남다른 품격은 인터뷰 현장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으레 영화 에 대한 질의응답으로 채워져 영화 홍보를 위한 자리로 여겨지던 인터뷰의 관행을 깨고 영화와는 무관한 이야기들로 연기, 그리고 인생을 이야기 한 것.

한 시간이라는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를 만큼 한석규의 이야기는 광범위하면서도 깊이 있었다.

지난 17일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한석규가 꺼낸 첫 이야기 역시 ‘프리즌’의 이야기를 기대했던 나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흐름이었다.

“스칼렛 요한슨이 오늘 한국에 왔나요? 이제 갔대요? 바쁜 사람이니까…”

인터뷰 당일 오전 내한 행사를 가진 할리우드 배우 스칼렛 요한슨에 대해 물으며 “영화 ‘HER’가 굉장히 좋았지 않냐. 나도 그런 영화 한 번 해봤으면 좋겠다”던 한석규의 첫 마디는 “스칼렛 요한슨은 참 배우로서 성격도 좋아보이더라. 사람이 좋아보인다”는 칭찬까지 이어졌다.

어디선가 “국내 배우 중에서는 누가 좀 괜찮아보이더냐”는 질문이 이어졌다.

“국내 배우 중에 딱 떠오르는 것은 혜수. 김혜수예요. 혜수와 저는 생각하시는 것 보다 훨씬 인연이 깊은 사이예요. 예전에 제가 MBC 20기 공채로 들어갔을 때 단역으로 시작했었는데 그 때 당시 혜수를 ‘한지붕 세가족’에서 만났었어요. 그리고 한 2년 후에 ‘파일럿’이라는 드라마에서 만났고, 또 2~3년 후에 ‘닥터봉’으로 첫 남녀 주연으로 만났었죠. 또 2010년에 ‘이층의 악당’을, 작년에는 ‘낭만닥터 김사부’ 마지막을 같이 했었죠. 그래서인지 혜수가 가장 많이 생각나네요. 저는 그냥 혜수가 좋아요. 그 친구를 생각하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죠. 대한민국 주연 여배우로 활동한지 30년이 넘었잖아요. 박수를 보내주고 싶어요. 게다가 연기자로서 겸손하기까지 하죠, 너무 겸손해서 탈이에요.(웃음)”

김혜수에게 ‘너무 겸손해서 탈’이라고 말한 한석규지만, 사실 한석규 역시 자신의 연기에 박하기로 소문 난 배우 중 하나. 실제로 앞선 인터뷰에서 한석규는 “이제서야 내 연기가 조금 봐줄 만 하더라”는 평가를 내놓기도 했다.

“연기자는 아마 거의 다 자신의 연기에 박할 거예요. 예전에 제가 신인일 때 기라성 같은 선배님들과 참 작품을 많이 했었어요. 고두심 선생님, 나문희 선생님 이런 분들과 함께 했었는데 정말 빈 말이 아니라 신인 시절 그 분들과 함께 작업을 햇다는 것이 ‘축복’이었던 것 같아요.  그 당시 선생님들의 연기를 보면 거의 완벽에 가깝다고 느껴졌었는데, 전혀 아니라고 하셨었죠. 지금 제가 그 나이가 돼 보니까 ‘아 이런 마음이셨겠구나’ 싶어요.”

   
 

영화 ‘프리즌’의 이야기는 시작도 하지 못했는데 어느덧 절반 가량의 시간이 지났다. 이제는 ‘프리즌’의 이야기를 꺼낼 때가 되지 않았냐는 질문이 이어졌다.

2014년 영화 ‘상의원’ 이후 3년만에 스크린에 복귀한 한석규는 “평소 시나리오를 고르는 기준이 까다롭다고 들었다”는 말에 “그렇지도 않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한석규가 ‘프리즌’의 출연을 결정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단순히 ‘프리즌’ 시나리오만 두고 출연 이유를 말하기보다는 나현 감독과의 인연부터 이야기 하는 게 맞겠네요. 나현 감독이 2013년에 저한테 ‘함께 작업을 하자’고 제안을 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 영화는 불발되면서 작업에 들어가지 못했었지만 그 당시 약 1년의 시간 동안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시간을 보냈었죠. 그러다가 2014년 쯤 나현 감독이 어느날 문득 다른 시나리오를 보내줬어요. 그게 ‘프리즌’이었는데 처음에는 저에게 희대의 악역인 ‘익호’ 역할을 던졌다는 것이 의문이었죠. 그래서 ‘이걸 날 보고 하라고? 왜 나예요?’라고 농담식으로 물었더니 저에게서 나현 감독이 생각하던 익호의 모습을 봤다고 하더라고요. 그 말이야 말로 배우로서 기분 좋은 말이지 않나요. 그래서 출연을 결정했죠.”

   
 

영화 속에서 한석규는 교도소 내 재소자들은 물론 간수들까지 쥐락펴락하는 ‘절대 권력자’인 익호 역으로 분했다. 악역이 처음은 아니지만 한석규가 맡은 역대 캐릭터들 중에 가장 악한 인물인만큼 개봉 전부터 그의 또 다른 연기 변신에 관객들의 기대감이 모이고 있다.

“악역에 대한 부담감이요? 물론 부담은 있었죠. 분명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처음에는 나현 감독님께 ‘익호는 나한테 좀 맞지 않는 옷 같다’고 말했었어요. 그 때 나현 감독이 저에게 ‘한석규 배우만의 익호를 만들어 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그 점에 저에게 중요했어요. ‘나만의 익호’를 만드는 거라면 내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있었으니까 도전을 한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굳이 제가 하지 않았을 것 같고요. 그래서 이번에 제가 만들어낸 익호는 ‘내가 할 수 있었던’ 익호를 만들어 본 거예요.”

나현 감독은 앞서 시사회 당시 익호라는 인물을 김동인의 단편소설 ‘붉은 산’ 속 ‘삵’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한석규 역시 나현 감독으로부터 ‘붉은 산’ 이야기를 전해듣고 소설을 읽었다고 입을 열었다.

“소설 속에서도 ‘삵’이라는 인물은 전혀 정체 불명의 인물이에요. 전사가 없죠. 얘가 어디서 흘러들어왔다거나 이런 것들요. ‘익호’도 똑같아요. 근간도 모르겠고, 뭐 하다가 왔는지도 모르겠고. 그게 더 공포스러운 것 같아요. 다만 혼자 생각해보자면 익호라는 인물은 처음에는 ‘절대 악’ 같은 인물은 아니었을 거예요. 교도소라는 공간, 그 곳에서 보낸 기간이 익호를 만들어낸 것 같아요. 교도소 내에서 살아남으려고 하면서부터 그런 인물이 탄생하고 완성된 것 아닐까요. 그러다가 또 익호같은 인물이 탄생하고, 그렇게 로테이션 되겠죠. 그게 이 작품의 주제인 것 같아요. 동물의 세계는 그런거잖아요. 사람의 세계도 크게 다를 것 같지 않아요. 그런 걸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무대를 또 한 번 해보고 싶네요.”

이와 같은 분석적 접근 덕분일까. 영화 속에서 한석규는 ‘익호’ 그 자체로 변신했다. 특히 표정, 감정, 행동, 말투, 그 어느 하나 놓치지 않은 디테일은 ‘익호’라는 인물에 대한 공포심을 더했다. 하지만 한석규는 “‘익호’는 그렇게 디테일하게 고민하고 연기하진 않았던 것 같다”는 의외의 말을 꺼냈다.

“다리 저는 연기요? 다리를 일부러 저는게 아니라 제 원래 걸음걸이가 살짝 삐거덕 거리는 경우가 있어요. 오히려 다른 작품에서는 그러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다면 익호는 오히려 그걸 생각하지 않고 걸으니까 그렇게 보였던 것 같아요.(웃음) 익호라는 인물은 저와 전혀 동떨어진 인물을 만들어 거기에 저를 맞추려 했던 게 아니라 인물을 보고 제 속에 그 캐릭터를 들어오게 하면서 만들었어요. 누구든 내면 한 구석에는 익호의 잔인함과 폭력을 가지고 있을거니까요. 단지 누가 그걸 표현하냐에 따라서 다른 형태로 나오는 거죠.”

   
 

이번 영화에서 한석규는 후배 배우 김래원과 함께 연기 호흡을 맞췄다. 평소 나이 차를 넘어 오랜 시간 낚시라는 취미를 함께 즐기며 친분을 쌓아 왔다는 두 사람인 만큼 두 사람의 첫 작품 속 만남에 기대감이 컸다. 덕분에 한석규가 김래원을 ‘프리즌’에 추천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 이어졌다.

“(김래원이) 함께 하면 좋겠다는 마음은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작품에 있어 누구를 추천하는 타입은 아니라서요.(웃음) 왜 그럴까요. 그냥 미안한 것 같아요. 제가 누구를 콕 집어서 같이 하는 것이요. 좋게 말하면 상대 배우가 누구든 상관 없고요. 이게 건방진 의미가 아니라 직업인으로서, 동료로서 만났을 때 아는 사람이 하게 돼서 좋은 점도 있지만 나쁜 점도 있고, 또 전혀 모르는 배우랑 했을 때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있는 것 같아요. 다행히 래원이랑은 좋은 점이 더 많았어요. 좋은 타이밍에 서로를 작품에서 만난거죠. 유권과 익호를 좀 다르게 이야기하자면 ‘프리즌’은 유권과 익호가 서로 사랑하는 이야기예요. 익호는 유권을 사랑하는건데, 나중에 익호가 하는 대사들만 봐도 이게 다 사랑해서 하는 대사들이에요. 유권이 여배우였다고 생각하면 정말 그냥 사랑해서 하는 말처럼 들릴걸요. 촬영 할 때 래원이랑도 그런 이야기를 하곤 했었죠.(웃음)”

영화 속에서 한석규는 김래원과 함께 교도소 내의 높은 감시탑 위에서 치열한 액션신을 선보이기도 했다. 감시탑 촬영 당시의 이야기가 나오자 한석규는 특유의 젠틀한 목소리로 “그 때 몸 상태가 정말 개떡이었다”고 입을 열었다. 마냥 선비같은 면모만 보여줄 것 같았던 한석규의 반전 매력이 풍겨져 나오는 순간이었다.

“감시탑 촬영을 4일에 걸쳐서 찍었는데 정말 몸 상태가 좋지 않았어요. 밤에 촬영을 해야 해서 낮에 자고 밤에 찍는 식으로 촬영을 했는데 첫 날은 할 만 했죠. 그런데 이튿날 되니까 온 몸이 아프고, 3일째는 여기저기 삭신이 쑤시더라고요. 래원이도 마찬가지였어요. 걔도 이제 40댄데.(웃음) ‘쉬리’ 때도 (최)민식이 형이랑 변전소에서 액션 촬영을 했을 당시 촉박했던 촬영 시간 때문에 정말 최악의 컨디션으로 찍어야 했었어요. 그런데 그런 와중에 만들어 지는 신이 좋을 때도 있어요. 그런걸 혼자 생각하면 연기라는 게 내가 잘 준비됐다고 마냥 좋은 건 아니구나 싶기도 하죠. 연기라는게 참 웃긴거죠. 이러면 이런대로 괜찮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고. 저러면 저런 대로 또 다른 결과가 나오고. 그런걸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아요.”

그러면서도 한석규는 연기자로서 건강 관리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연기자는 몸으로 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평소 동료, 후배들에게 정말 신신당부해요. ‘절대 건강을 잃지 말아라’ 하고요. 건강이라는 게 별거 아니라 그냥 아프지 않아야 하는 것 같아요. 연기라는게 어떻게 보면 ‘육체노동’이잖아요. 저도 부상도 당해보고 부상 때문에 연기자의 꿈을 접은 적도 있었어요. 그래서 정말 몸이 중요하다는 걸 절감했죠. 다들 건강을 챙기면서 다치지 않게 조심했으면 좋겠어요.”

   
 

인터뷰가 끝나기 직전까지도 한창 이야기를 이어가던 한석규는 문득 “저는 정말 복이 많은 배우인 것 같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제 능력을 떠난 운 같은 것 같기도 하고. 고마워요 그냥, 제가 복이 많은 것 같아서요.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자체도 그렇고, 그러한 것을 제가 선택해서 할 수 있다는 것도 고맙죠. 그런 반면에 한편으로는 ‘아, 잘 해야겠다. 할 수 있을 때 정신 바짝 차려서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이어 한석규는 자신의 연기 인생 터닝 포인트가 됐던 한 가지 에피소드를 꺼냈다.

“어느 날 우연히 제가 20대 때 정말 존경했던 연기자 선배님을 뵀어요. 그 분이 저에게 ‘내가 자네 나이라면 다시 한 번 해볼텐데’라는 말씀을 해주셨었는데 그 때 정말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어요. ‘내 나이를 부러워 하는 선배님이 계시구나’하는 생각 때문에요. 당시 제가 40대 후반의 나이었는데 저는 ‘이제 곧 50대인데 얼마나 더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던 약간 배부른 사람이었거든요. 그런데 선배님께 그런 말씀을 듣고 나서 정말 느끼는 바가 많았어요. 그래서 늘 그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아요. 60대가 돼도 그 나이를 부러워 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저도 배부른 생각 하지 않고 6~70대가 돼서도 그 나이 때 하고 싶은 작품, 하고 싶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스타서울TV 홍혜민 기자/사진=쇼박스]